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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외사(상)

6대 기서 중 한 권인 중국 고전소설의 대표작 정통 세계문학을 지향하는 을유세계문학전집의 스물일곱 번째와 스물여덟 번째 책은 중국 6대 기서로 고전소설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오경재의 『유림외사』이다. 『유림외사』는 작자 오경재가 거듭되는 불행과 고통 속에서 체험을 통해 비판적으로 통찰한 청대의 사회 현실, 특히 타락한 지식인 사회의 본질을 파헤쳐 무려 10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자전적(自傳的) 걸작이다. 청대 지식인 사회의 위선적이고 비틀린 모습을 각 회에 등장하는 온갖 인물 군상들을 통해 찬찬히 관람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작품에 나타난 청대 지식인은 크게 네 부류로 유형화된다. 먼저 과거 급제의 수단인 팔고문(八股文)을 진리로 신봉하는 이들[八股士]과 가짜 ..
6대 기서 중 한 권인 중국 고전소설의 대표작

정통 세계문학을 지향하는 을유세계문학전집의 스물일곱 번째와 스물여덟 번째 책은 중국 6대 기서로 고전소설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오경재의 『유림외사』이다.
『유림외사』는 작자 오경재가 거듭되는 불행과 고통 속에서 체험을 통해 비판적으로 통찰한 청대의 사회 현실, 특히 타락한 지식인 사회의 본질을 파헤쳐 무려 10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자전적(自傳的) 걸작이다.
청대 지식인 사회의 위선적이고 비틀린 모습을 각 회에 등장하는 온갖 인물 군상들을 통해 찬찬히 관람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작품에 나타난 청대 지식인은 크게 네 부류로 유형화된다. 먼저 과거 급제의 수단인 팔고문(八股文)을 진리로 신봉하는 이들[八股士]과 가짜 명사[假名士]들이다. 팔고사(八股士)들은 주진(周進), 범진(范進)처럼 과거 급제를 통해 또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자들은 다른 식으로 가령 마정(馬靜)처럼 시문(詩文) 선집을 하는 방식으로 팔고문을 선양한다. 또한 경본혜(景本蕙)나 누봉(婁琫), 누찬(婁瓚) 형제와 같은 가짜 명사들은 시가(詩歌)나 유희를 통해 명성을 추구하며 타락한 사회에 기생한다. 이들은 길은 달라도 현실적인 권세와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동질적이며, 그 위선적 정당성을 신념으로 추구한다는 점에서 변질된 전통이 만들어낸 잉여인간들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우육덕(虞育德), 장상지(莊尙志)처럼 진정으로 원시 유가의 가르침을 견지한 현인들과 두의(杜儀)처럼 강인한 개성과 자존적 태도로 그 정신을 견지하는 기인들도 있다. 그러나 뒤틀린 청대 지식인 사회 속에서 그들은 어리석거나 미친 존재로 낙인이 찍힐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저항하다 절망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의 퇴장은 숭고하다기보다 쓸쓸한데 그것은 그들의 싸움이 개인적이고 내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림외사』의 주제는 병든 사회 제도 전반에 대한 고발이자 그 속에서 무력하게 스러져가는 개별 지식인들의 실상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루쉰(魯迅)은 1935년에 발표된 ?시에쯔(燮紫)의 ??풍성한 수확[豊收]??에 대한 서문?에서 중국에선 확실히 ??삼국지연의??와 ??수호전??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에 아직 삼국(三國)의 기풍과 수호(水滸)의 기풍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림외사??를 쓴 작가의 능력이 어찌 ??삼국지연의??를 쓴 나관중(羅貫中)보다 못하겠는가?라며 이 책에 대한 문학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역자인 홍상훈 교수(인제대 중문과)는 이 작품에 대해 작자가 형상화한 주인공들이 모두 청대 지식인 사회의 중요한 부분들을 대표하는 형상이라는 점과 작품 전체에 그들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녹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주인공들의 세세한 언행들을 되짚어보면, 오경재가 일궈놓은 무질서 속의 질서와 언중유골(言中有骨)의 빼어난 경지에 깊이 감동하게 될 것이다라며 작품의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
저자 : 오경재 (吳敬梓)

오경재는 자가 민헌(敏軒)이고 호는 입민(粒民)으로 만년에는 문목노인(文木老人), 진회우객(秦淮寓客)이라고도 했다. 안휘성(安徽省) 전초현(全椒縣)의 비교적 유복한 관료 집안에서 1702년에 태어난 오경재는 23세 무렵까지 정통적인 유가(儒家) 교육을 받으며 과거 시험을 준비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1차 시험에 합격해 수재(秀才)가 되었다. 그러나 생부(生父)와 사부(嗣父)의 사망, 뒤이어 유산 분배 문제를 놓고 벌어진 친척 간의 다툼, 아내의 병사(病死), 잇단 과거 실패로 인한 좌절과 방황 등을 겪은 후 33세 되던 해에 고향을 떠나 남경(南京)으로 이주했다. 이후 36세 되던 해에 일종의 인재 추천제도인 박학홍사과(博學鴻詞科)에 천거되었으나 병이 들어 정시(廷試)에 참가하지 못하고, 41세까지 남경에 머물면서 명사들과 교유했다. 특히 이 시기에 그는 남경 선현사(先賢祠)를 수리하는 데에 참여하면서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모두 잃고, 이후로 죽을 때까지 가난에 시달리며 남경과 양주(揚州), 고향 등지를 떠돌다가 1754년 양주에서 객사(客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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