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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실 가는 길

가난한 고아에서 삶을 개척한 어른으로 성장했어도 현실과 불운의 냉대를 피하지 못하는 처지를 비관하며 자기 학대와 신을 향한 저주에까지 사로잡히는 그 남자. 나는 대 바겐세일 광고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조물주는 나를 유리 안에 전시해놓고 저런 광고를 내걸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란 인간을 어떻게 저렇게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정말이지 나는 조물주가 대 바겐세일 한 인간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품질이 좋지 않은 것을 숨기고, 교환해주지 않는 조건으로 세일해버린 인간. 나는 과연 몇 퍼센트나 할인된 인간일까. 50%? 80%?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덤으로 세상에 넘겨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살아가는 행위로 말미암아 가슴 저밈 증세를 앓고 있을 만큼 유약한 그 남자...
가난한 고아에서 삶을 개척한 어른으로 성장했어도 현실과 불운의 냉대를 피하지 못하는 처지를 비관하며 자기 학대와 신을 향한 저주에까지 사로잡히는 그 남자.
나는 대 바겐세일 광고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조물주는 나를 유리 안에 전시해놓고 저런 광고를 내걸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란 인간을 어떻게 저렇게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정말이지 나는 조물주가 대 바겐세일 한 인간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품질이 좋지 않은 것을 숨기고, 교환해주지 않는 조건으로 세일해버린 인간. 나는 과연 몇 퍼센트나 할인된 인간일까. 50%? 80%?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덤으로 세상에 넘겨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살아가는 행위로 말미암아 가슴 저밈 증세를 앓고 있을 만큼 유약한 그 남자. 본의 아니게 유복자로, 애비 없는 호로 새끼로, 육성회비를 제때 내지 못하는 지질이 궁상으로, 색맹으로 특별 관리 대상이 되어 살아온 패배감에 정점을 찍게 한 열성 혈액형(RH-)을 갖고 있지만 그 피로 새 생명을 구하게 되는 그 남자.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혈액원에 등록이 돼 있다면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승복할 수 없었다. 만약 내 혈액형이 RH-형이라면 혈액원 피로 내 피를 바꿔서라도 RH+형으로 만들고 싶었다. 아니, 세상 사람 모두를 RH-형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병원에 도착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기왕에 헌혈해주기로 한 거 티내지 말자란 생각보다, 빨리 헌혈하고 아내에게 가고 싶었다. 아니, 그보다도 아내와 아내 뱃속에서 죽어가는 아기를 걱정하며 초조하게 복도 한 귀퉁이에 서 있는 사내를 보자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지금껏 맛보았던 가슴 저밈과는 성질이 달랐다. 제발 내가 RH-형이어서 그를 도와줄 수 있었으면 싶었다.
- 「회복실 가는 길」중에서
저자 : 이성준
1962년 제주도 조천에서 태어났다. 남의 은공으로 대학을 마쳤고, 고등학교 교사로도 근무했었다. 늦게야 철이 들어 2010년에 〈소설과 영화의 서술기법 비교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소설을 전공했으면서도 소설보다는 시 창작에 관심을 가져 세 권의 시집(《억새의 노래》 《못난 아비의 노래》 《나를 위한 연가》)을 펴내기도 했으나, 이제 전공인 소설에 매진하려고 한다.
작가회의 / 단국문인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위에서 말한 시집 세 권과 《이청준과 임권택의 황홀한 만남》 《이야기로 풀어가는 우리 시조》 《읽기만 해도 기억되는 고사성어 365(상)》 《글쓰기의 이해와 활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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